메아리 저널

이산 구조 수업

이번 학기에 이산 구조 과목을 듣고 있는데, 전산학과 선배들이 이것만은 꼭 피하라고 말해 주는 과목이 "가을에 듣는 이산 구조 과목" 같은 것들이다. 그 이유인 즉, 가을에 이산 구조를 들으면 DB 교수님이신 황 모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수강 신청 취소(drop이라고 보통 한다)는 안 했는데, 어차피 대충 들으면 무슨 말인지는 알기 때문에 수업의 진행이 실제로 내가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주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 모 교수님의 이산 구조 수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마치 강의 노트 안 읽고 즉흥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느낌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슬라이드의 틀린 부분을 실시간-_-으로 수정한다던지, 엉뚱한 증명을 내 놓다가 반론에 부딫혀서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던지, 수업이 끝나는 시각이 수업이 시작되는 시각(심지어 정시보다 20분 늦게 도착하기도 한다!)에 비례한다던지... 등등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어떻게든 수업은 진행되는데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서 웃겨서 수업을 할 수 없다던지 하기도 하는데, 어제 수업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이항 관계(binary relation)에 대한 내용을 진행하고 있었다. 깊게 들어 가면 좀 난감하니까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떤 집합 A가 있을 때 A의 원소 a와 b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런 관계들을 집합으로 모아 놓은 것이 이항 관계이다. 예를 들어서 A = {1,2,3}일 때 관계 R = {(1,2),(1,3),(2,3)}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R은 a가 b보다 작다는 관계가 되는데, 이런 관계 R이 a와 b 사이에 존재할 때 a ≤ b라고 표시한다. (당연히 a와 b는 숫자 말고 다른 것도 될 수 있다)

관계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내가 말하려는 그 시점에서는 동치 관계(equivalence relation)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관계에서는 A 안의 임의의 원소 a, b, c에 대해서, a ≤ a가 항상 성립하고(반사적; reflexive), a ≤ b이면 b ≤ a이며(대칭적; symmetric), a ≤ b이고 b ≤ c이면 a ≤ c이다(추이적; transitive). 이렇게 써 놓는다고 이해가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교수님께서는 "학생 a와 b가 같은 기숙사에서 사는 관계"를 예를 들면서 말씀하셨다. 사실 그 예를 들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갔다.

뭐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 교수님의 특징이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했는 지 확인하고서야 그 다음으로 넘어 간다는 것이어서 어김없이 확인 작업(-_-)에 들어 갔다. (아마 내 입장에서는 선배가 될) 어떤 여학생의 차례가 되었는데 머뭇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 하길래, 교수님께서 좀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다른 학생에게 저 학생이 왜 대답을 못 하는 것 같냐고 물었다. 그 대답이...

남자 기숙사는 여러 동 있는데 여자 기숙사는 한 동 밖에 없잖아요. (토끼군 주: 사실은 여자 기숙사를 한 동 더 짓고 있지만 현재 사람이 사는 기숙사는 한 동 밖에 없다)

순간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교수님의 질문에 뻣뻣하게 굳어서 밋밋한 대답을 하는데 저런 센스라니! 무진장 감동했다. T_T

...그래서 어쨌냐고? 상황이 정리된 후에 교수님은 기숙사라는 표현을 남자 기숙사라고 바꾸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아무래도 문제의 수업은 상당히 오래 기억될 만한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 -_-;

이 글은 본래 http://tokigun.net/blog/entry.php?blogid=7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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