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한국 법과 GPL

* 워낙에 엘림넷 대 하이온넷 사건(이하 "사건")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건의 개요에 대해서는 KLDP BBS에 올라 온 글을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최근에 나온 이 사건의 판결문에서 GNU GPL이 아주 정통으로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판결문에서 송 창훈 님이 일부러 밑줄 쳐 놓은 부분만 읽어 보면 더더욱. 이 새 블로그의 첫 글을 이런 썰렁하고 딱딱한 얘기로 시작해서 좀 아깝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겠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듯 이번 사건은 GPL을 법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첫 사례로 써 먹기에 곤란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GPL에 따라 배포되는 소스 코드를 사용한 프로그램을 영업 비밀이 아니라고 해도 그 외의 혐의점만 인정해서 유죄를 선고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GPL이 실질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첫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의 판결이 적어도 GPL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야 "했다는" 점만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번 판결은 참으로 황당할 따름이다.

나는 한 정엽 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 자체는 판결의 내용과 관계 없이 법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뭐라 말하지 못 하겠으나, 적어도 판결문의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한 판단" 2번 항만으로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GPL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영업 비밀로 인정하는 판결문은, 무슨 자유 소프트웨어를 보통 쓰는 프리웨어랑 비슷한 건가보다 하고 착각하는 장 모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번 판결을 주도한 법조인들에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본질에 대해서 좀 말해 주고 싶다. (욕도 곁들 수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그냥 "소스 코드가 공개되어 있는 프리웨어" 같은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는 공공재와 같아서 만인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그 철학을 현실화한 것이 자유 소프트웨어의 개념이자 GPL과 같은 라이센스들이다.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철학이 아주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현대 사회가 수정자본주의에 공산주의도 종종 섞는 모습 -- 복지사회는 따지고 보면 공산주의를 어느 한도 안에서 적용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으로 변화해 가는 걸 따져 보면, 자본주의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기 때문에 이런 시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소프트웨어의 일방적인 독점이 결국 사회에 피해를 준다고 주장하던 리차드 스톨만은 이런 점에서 아주 정확하게 문제를 짚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픈 소스 진영에서 모두 GPL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유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GPL에 관심을 갖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이번 판결문처럼 GPL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FSF의 입장에서는 엘림넷이나 하이온넷이나 GPL로 되어 있는 소프트웨어를 고친 후 공중에게 그 개선된 사항을 배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업체(리차드 스톨만이 "악"으로 생각하는)와 다름이 없지 않는가. 이미 우리나라 법조계에 대해서는 별 희망을 갖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상위 법원에서는 이런 판결이 나오질 않길 바랄 뿐이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 GPL의 법률적 검토와 연구가 활발해지길 바란다. (저번에 CCL 때처럼 일반인에게 닫혀 있는 상황은 별로 내키질 않는다만)

덤: 다음부터는 GPL 말고 좀 괴악한 라이센스로 프로그램을 배포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예를 들어서 WTFPL이라던지, OTL라던가. (via klutzy)

이 글은 본래 http://tokigun.net/blog/entry.php?blogid=2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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