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불신

요즘 이리 저리 시끄럽지만 거기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니, 내가 말을 안 해도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나보다 그들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하지만, 그래도 말할 건 남아 있다.

나는 황 교수도 MBC도 KBS도 YTN도 믿지 않는다. 더 넓게 말하면 이 세상과 어느 규모 이상의 조직에 대한 불신이랄까. 처음에는 지나가는 소리로 "이번에도 언론에서 삽질하고 있겠죠"라고 했지만 진실이 밝혀 지고 난 뒤에는 어느 누구도 바른 소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봤듯이, 그리고 태우 님을 비롯한 여러 분께서 지적하신 대로 대중도 충분히 우매하다.

위키백과는 대중의 지식을 하나 하나 모아 나가면서 성장해 왔다. 물론 위키백과의 정확성 뒤에는 보는 눈이 많으면 충분히 정확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보다 더 뒤를 보면 적지 않은 자원봉사자들이 위키백과에서 활동하면서 잡음을 제거해 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요컨대 그 "보는 눈"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대중이 되기는 힘든 것이다. Web 2.0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결국 이 문제를 피해 나갈 수는 없다. 물론 영문 위키백과야 사람들이 꽤 많으니 뭐 그렇다 쳐도, 상대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적은 한국어 위키백과에 사람들이 몰려 들 때 발생할 혼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대중을 믿을 수 없다면, 대중들 사이의 유행(종종 광기)에 휩쓸려 가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그 유행을 받아 들이기 전에 충분한 생각은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교육을 그리 제대로 받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나 여건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유행에 휩쓸려 지내게 되고, 대중은 계속 믿을 수 없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신은 여기서 출발한다. (출발했다는 말은 이것 때문에 사회를 믿지 않게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마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신뢰는 깨졌을 것이다. 단지 개념으로 따지면 맨 앞 쯤에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이다.)

다시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 오면... 대중도 그렇고, 황교수도 그렇고 언론들도 믿을 건 못 된다. 이미 황교수의 행동은 정치적이라고 보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물론 이게 황교수가 원한 건지는 논외로 쳐도) 그런 상황은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라는 건 좋게 말하면 세상 돌아 가는 데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사건의 본질은 사라진 채 정치라는 엉뚱한 테두리만이 남아 버리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사건이 제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사라진다. 정치는 그 자체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정치가 개입하면 믿을 수 없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거랑 별개로, 일정한 규모 이상의 조직 또한 신뢰할 수 없다. 대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그러한 조직 안에서 뭔가 응큼한(?) 것이 생길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IRC에서 악필 님이 황교수를 의심하면서 분명 그 연구원들이 난자를 자기 의지로 기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 것이 한 가지 예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런 응큼한 것이 있는 조직은 결국 뭔가 터지면 믿을 수 없어진다.

이렇게 따지면 국가도 믿을 수 없다. 물론 국가가 없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지만, 그건 사회나 (말하자면) 대기업 등등이 없어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가 없어져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국가가 믿을 만하다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고, 우리는 이미 국가가 별로 믿을 만하지 못 하다는 걸 심심찮게 봐 왔다. 김 규항 같은 분들은 아예 국가는 의미가 없으며 계급만이 의미가 있다고 하신다. 물론 나는 여기에 딱 반만 동의하는데, 어차피 대중에 계급을 나눠 봤자 대중은 대중이니 변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집단 안에서 살아 가야 한다면? 보통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은 몇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 집단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믿는 척 하면서 살아 가는 거고, 다른 한 가지는 집단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그 집단을 빠져 나오는 것.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망설이면서 첫째를 택할 것이고, 아마 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종종 두 번째 선택을 하려고 하고는 있지만 내 자신에게 그리 많은 능력이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면 결국 첫 번째 선택으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세 번째 선택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참 난감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집단은 믿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믿고 싶다. 집단과는 달리 개인은 한 번 마음을 열면 적어도 응큼할 일은 없고, 보통 일방적인 대화만이 가능한 집단과는 달리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정도 성선설을 지지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집단 안에 들어 가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 등에서 봤듯이 인간은 집단 안에서 충분히 악해질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집단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선하다고 믿고 싶다.) 물론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믿을 수 없는 집단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온라인에서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하고 관계를 쌓아 가려고 한다.

내 생각이 옳은 건지도 모르겠고, 졸면서 써서 글이 잘 쓰여진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만 말한다면, 나는 이 세상은 믿지 않지만 그 세상에 살아 가는 사람만은 믿고 싶다는 거랄까.


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올블로그 보는 건 때려 쳤지만 yui 님의 플래닛은 잘 보고 있다. 적어도 나는 올블로그라는 시스템보다는 yui 님을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올블로그라는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신뢰"라는 요소가 회복되지 않는 한 나는 한동안 올블로그를 비롯한 메타 사이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앞으로의 올블로그가 고쳐 나가야 할 것이기도 하고.

이 글은 본래 http://tokigun.net/blog/entry.php?blogid=27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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