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카이스트 아이피 주소의 신비

모종의 작업을 하느라 모 군과 열심히 놀면서 삽질을 하다가, 2바이트짜리 identifier를 정할 일이 생겼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대충 묘사한-_- 것이다.

토끼군: 어이~ 니 맘에 드는 숫자 하나만 골라 봐. 65536보다 작은 걸로.
모 군: 65356? 그냥 예전에 썼던 그 숫자 쓰면 안 돼?
토끼군: ...겹치잖아 이 놈아.
모 군: 으음... 첫 바이트는 60h, 다음 바이트는 61h.
토끼군: 뭔 뜻인데?
모 군: 그냥 찍었지 뭐.
토끼군: 그건 좀 아니고-_- 뭔가 뜻이 있는 걸로 골라 봐... 아, 143/248은 어때?
모 군: 143/248...?
모 군 룸메: 아, 카이스트가 class B라서 그걸로 시작하지?
모 군: 아 아이피 말하는 거였어? 뭐 좋네.
토끼군: 뭐 문제 없으면 이걸로 한다. (16진수 표현을 구하던 중) ...어 이거 뭐야.
모 군: 어? (화면을 보고) 컥 이거 정말 뭐지?
모 군 룸메: 야 이거 좋네.
토끼군: 초대박이다! 쥑이네. 당장 이걸로 해야지!

..뭐 이 정도의 상황이었다. 사실 그렇게 "초대박"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143 × 256 + 248은 36856인데, 이걸 16진수로 바꾸면 8FF8h가 된다. 무려 대칭이지 않는가! -_-; 쓸데 없는 데 신경 쓰는 토끼군과 그 친구들한테는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카이스트 아이피 얘기가 나왔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까 카이스트 아이피가 언제부터 나왔는 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덤으로 한 번 찾아 봤다.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 2.0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아이피 주소인 128.134.0.0은 1986년 6월 30일에 할당되었으며, 8월 8일에 카이스트 호스트가 정식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143.248.. 대역이 8월 8일에 등록된 걸로 생각했으나, 조금 문서를 읽어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메일 기록에 따르면,

INTERNET ADDRESS of SDN

The new class and network number for SDN is:
    Class B, #128.134

It was assigned by Mr. Joyce K. Reynolds <JKREYNOLDS%usc-isib.arpa@CSNET-RELAY>
dated on 30 June 1986

SDN HOST TABLE

Host : 128.134.0.1 : kaist,sdngate : VAX-11/750 : UNIX : TCP/TELNET,TCP/FTP,
  TCP/SMTP :
(생략)

그러니까 당시 카이스트에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단 한 대(128.134.0.1; 그것도 VAX-11이라니 -_-)였던 것이다. 당시 네트워크의 크기를 생각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일이다. 그럼 도대체 143.248 대역은 언제 할당된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혹시 IPv4 Address Space Report를 보신 분이 계신지? 여기에서는 IPv4(잘 뒤져 보면 IPv6도 나옴) 주소 영역이 얼마나 등록되었으며 그 종류나 국가별 등록 현황 등을 레포트 형식으로 아주 자세하게 보여 준다. 여기에 바로 나온 건 아니지만, 맨 아래의 데이터 셋들을 뒤져 보면 할당된 아이피 대역들의 목록과 그 날짜가 나온다. 여기에 따르면,

128.134.0.0/16 65536 19860630 apnic adv
143.248.0.0/16 65536 19901026 apnic adv
(순서대로 아이피 대역, 할당된 아이피 수, 등록된 날짜, 레지스트리, 공시 여부)

즉, 128.134.0.0/16 대역을 할당 받고 4년 후에 카이스트가 독립된 아이피 대역 143.248.0.0/16으로 분리된 것이다. (처음에 1986년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기보다 더 나이 많다고 하던 모 군이 나중에 얘기를 듣고 자기 동생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얘기를 하더란다...)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in Asia에 따르면 APNIC이 설립된 때는 1983년이라고 한다. 위의 자료에 따르면 APNIC은 1985년에 첫 아이피 대역을 할당했으며, 128.134.0.0/16은 세 번째 등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IPv4 주소 공간은 차고 넘치려고 난리를 치고 있지만 그래도 당시에 한국에 인터넷의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반론도 꽤 많지만 아무튼) 인터넷 강국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뭐, 카이스트 아이피 주소로부터 이런 걸 알 수 있었다는 것도 참 재밌었다 :)

그나저나 143.248.0.0/16이라는 주소가 우연하게 정해진 건지 아니면 뭔가 사려깊은 선택이었는 지는 참 궁금할 따름이다. nibble 단위로 대칭이라니 -_-;

세월이 지나, 2010년 현재 카이스트 아이피 대역은 143.248.0.0/16, 110.76.64.0/18 (기숙사), 192.249.16.0/20 (주로 무선랜) 등으로 나뉘었다. 물론 후에 할당된 대역은 물론 남는 공간에서 요청 순서대로 할당된 것이리라. (2010-03-25)

이 글은 본래 http://tokigun.net/blog/entry.php?blogid=11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rev 1d46270eb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