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휴지통

윈도우를 비롯한 다양한 GUI 운영체제에서는 휴지통이라 불리는 컨셉을 지원한다. 이 기능인즉 파일을 지워도 일단 휴지통에 먼저 들어 가고, 휴지통에 할당된 용량이 모자라거나 명시적으로 지우도록 할 때만 실제로 지우고 그렇지 않으면 지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윈도우 95를 쓰기 시작한 때는 1996년 -- 95 나오기 전부터 컴퓨터를 했지만 그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도스만 썼다. -- 이었고, 그 때만 해도 내부적으로 운영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휴지통을 그런가보다 하고 썼다. 그러다가 Shift-Del을 누르면 휴지통에 안 넣고 파일시스템에서 바로 삭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휴지통이 뭔가 파일시스템을 건드린다던지 하는 신비한 방법으로 파일을 복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동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자 습관적으로 Shift-Del을 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휴지통을 안 쓰고 지낸 게 그다지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윈도우를 쓴 지 1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실수로 파일 삭제해서 피를 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DataMagic 같은 걸로 복구를 할 수는 있지만 한 번 복구하는데 시간도 한참 걸리고 재수 없으면 복구도 안 되고 해서 난감했던 적이 많다. (그나마 요즘은 DataMagic이 NTFS도 잘 지원하는데 옛날에는 디스크 단위로 검사를 하더라)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편의를 위해 추가했던 기능이 거꾸로 사용자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아주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김창준 님께서는 이전에 IT 기업 속 인류학자라는 글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저는 예전에는 그래도 컴퓨터쟁이라고 단축키를 써서 ctrl-x를 해서 잘라낸 다음 폴더를 이동하고 거기에 ctrl-v를 했습니다. 탐색기는 하나만 사용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쓰다보니 뇌에 부담이 크더군요. 유저 인터페이스 디자인에서 말하는"상태"와 "모드"(state/mode) 개념이 생기는 겁니다(자세한 내용은 제프 라스킨의 Humane Interface를 참조. 초강추). 내가 ctrl-x를 했다는 사실을 머리속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파일들을 골랐는지도 기억하고 있어야하고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탐색기를 두 개 띄워놓고 한쪽은 출발폴더, 다른쪽은 목적폴더로 맞춘 다음 드래그앤드랍을 이용해서 파일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동감하기는 하는데, 확실히 두 개의 창을 같이 띄워 놓고 작업을 하는 게 의외로 어려워서 -- 창 기반 GUI는 한참 쓰다 보면 창이 여기 저기 널려 있게 되는데 시각적으로 적응이 안 되어서 최대화를 시키게 된다 -- 듀얼 모니터를 사거나-_- 하기 전까지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아무튼, 아무리 좋은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있어도 그 인터페이스를 무마시킬만한 다른 인터페이스가 있다면 그건 의도하지 않은 대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뭔가 지울 때 이렇게 해 볼 생각이다.

  • 문서, 코드, 그림, 자료 파일들은 모두 Del 글쇠만 눌러서 휴지통에 넣는다.
  • 파일이 큰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진행한다. (이런 것만 제한적으로 Shift-Del을 쓰게 되면 절대로 습관이 안 고쳐진다. -_-) 다만 이런 종류의 파일은 웬만하면 빨리 휴지통에서 지운다.
  • 가급적이면 ReiserFS 같은 종류의 저널링 파일 시스템으로 이전을 고려해 본다. orz (운영체제 차원에서 저널링을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지원하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를 지도...)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바꾸는 과정은 어렵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 겠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 ;)

그 뒤 나중에 맥과 리눅스를 쓰면서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윈도에서 Shift 누르면서 삭제를 해서 휴지통을 안 쓰게 되는 버릇은 여전하다. (리눅스에서도 터미널이 아닌 이상 그렇게는 안 ㅎ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 위에 링크한 DataMagic 홈페이지는 현재 이전했다. (2010-05-06)

이 글은 본래 http://lifthrasiir.tistory.com/13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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