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저널

킬로그램

킬로그램은 SI, 국제 단위 체계에 정의된 단위들 중 유일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으로 정의되는 단위이다. 처음에는 물 1리터가 섭씨 4도(이 때 밀도가 최대가 되는데, 정확한 온도는 이것보다 아주 약간 더 낮다)일 때의 질량으로 정했다가, 여차 저차 해서 지금은 국제 킬로그램 원기(IPK)의 질량으로 정해져 있다.

한 번 이런 상상을 해 보자. IPK가 도둑맞았다고 하면 킬로그램의 정의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다행히 킬로그램의 정의와 실제 구현(practical realization이라고 하며, 정의를 바꿀 필요 없이 바꿀 수 있다.)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당장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정의에 등장하는 현물이 사라졌다는 건 그 정의를 추후에 수정하거나 할 때 상당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물론 IPK 자체는 어디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창고에 잘 저장되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저장만 해 놓으면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는데다 여러 가지 불편함이 따른다. 따라서 IPK와 같은 질량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복제품(replica)이 존재한다.

킬로그램 원기의 복제품들은 흔히 K 뒤에 숫자를 붙여서 표기하며, K1부터 K40까지가 최초의 복제품으로 같은 틀에서 같은 일시에 같은 조건으로 찍혀 나온 것이다. (IPK와는 다른 일시에 찍혀 나왔지만 기타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 이 복제품들은 일부는 함께 저장되어 있고, 일부는 세계 각국에 국가 표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배포되어 있다. 킬로그램 원기는 정의에 따라 질량이 1kg지만, 이들 복제품들의 안정성을 확인해서 간접적으로 실제로 킬로그램 원기의 안정성을 테스트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상당히 골이 때린다.

위는 위키백과에서 퍼 온 K21부터 K40까지의 상대 질량 그래프이다. (중간에 K8(41)이라고 되어 있는 게 있는데, 이건 원래 번호가 K8이었지만 실수로 K41이라고 찍어 버려서 그냥 저렇게 부른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복제품이 IPK에 비해 질량이 올라가고 있다! 사실은 IPK 자체도 꾸준히 질량이 올라가고 있다는 게 알려져 있고, 그 중 대부분의 질량이 공기 중(IPK는 외부 공기와는 차단되어 있지만 여전히 공기 중에 저장된다)의 오염물이 달라 붙어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이들 원기를 세정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마련되어 있고, 이 프로세스 이후의 질량의 변화를 모델링까지 해 놓았다.

하나 특이한 것은 IPK에 비해 665ug나 질량이 줄어 든 K39이다. 이건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데, 1958년 이전에는 일본에 있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전된 것이다. 질량이 줄어 든 결정적인 이유는 표면이 긁-_-;힌 것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킬로그램 원기 자체가 깎여 나가거나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이다. (665ug는 1kg에 비하면 150만분의 1에 불과하다!) 이것때문에 대한민국이 실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기는 K39가 아니라 그 뒤에 만들어진 K72와 K84이다.

하여간 이런 통이니 킬로그램의 정의를 계속 현물로 유지해도 되느냐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는 게 사실이고, 실제로 다른 대안들을 찾는 연구가 많이 있었다. 근데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IPK만큼, 그러니까 1억분의 1보다 작은 불확실성을 가지는 대안이 없었다. 예를 들어 실리콘과 같이 매우 정밀한 가공 과정이 확립되어 있는 원자들의 "갯수"로 질량을 정의하거나, 전자기력을 사용해서 정밀한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와트 저울 같은 시도가 있다. 킬로그램의 정의는 2011년에 재검토될 예정인데 그 때 어떤 결론이 나올 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 글은 본래 http://arachneng.egloos.com/1322794에 썼던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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